시뮬레이션 우주론: 현실의 오류인가, 치밀한 코드인가
빛의 속도라는 물리적 장벽부터 방정식 속 오류 정정 코드까지. 현대 물리학이 묻는다. 우리는 정말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가.
글쓴이 H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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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 Photo by Nicole Avagliano
우주의 렌더링 한계치
밤하늘의 별을 볼 때 우리는 과거를 본다. 빛이 우주 공간을 건너 도달하는 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 때문이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비틀어보면 어떨까. 만약 이 우주가 거대한 컴퓨터라면 말이다.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 킬로미터는 우주라는 시스템이 허용하는 최대 정보 처리 속도, 즉 하드웨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우주에서 가장 작은 단위인 플랑크 길이는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픽셀에 대응한다. 모든 열운동과 정보 처리가 멈추는 한계점인 절대영도는 시스템의 작동 정지 상태를 연상시킨다. 우주의 모든 물리적 한계는 마치 프로그래머가 설정해 둔 데이터의 임계치처럼 맞물려 있다.
철학이 된 통계학
2003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제목은 간결했다. '우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가?'
보스트롬의 논리는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확률론이다.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 진입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엄청난 연산 능력을 바탕으로 조상들의 삶을 모방한 가상 우주를 수십억 개 이상 구동할 것이다. 그렇다면 통계적으로 우리는 단 하나뿐인 진짜 현실의 인류일 확률보다, 수십억 개의 시뮬레이션 속 존재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일론 머스크나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 같은 기술자와 과학자들이 이 가설에 동조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것이 SF 영화의 대본이 아니라, 현대 학계가 다루는 공식적인 확률론적 가설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저에 발생한 틈
여기까지는 흥미로운 철학적 사고실험으로 치부할 수 있다. 논리적이지만 물리적 증거는 없는 현대판 형이상학이다. 하지만 기이한 점은 물리학이 발전할수록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관측 결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990년대,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는 ‘모든 것은 비트에서 온다’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물질이 입자가 아니라 예 혹은 아니오로 이루어진 정보라는 주장이다. 이어 헤라르뒤스 엇호프트와 레너드 서스킨드는 홀로그래픽 우주론을 수학적 모델로 정립해 냈다.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의 우주가 실제로는 2차원 표면에 기록된 정보의 투영일 수 있다는 이론이다.
철학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가설이 물리학의 공식들과 묘하게 겹치기 시작했다. 망원경이 깊은 우주를 들여다보고 입자 가속기가 원자를 쪼갤수록, 세계의 바닥에서는 물질이 아닌 정보와 코드의 흔적이 발견된다. 현실의 기저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우주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물질이 아니라, 1과 0으로 이루어진 정보의 흔적이 발견된다.
현실의 이면을 가리키는 세 가지 증거
렌더링의 절약과 관찰자 효과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은 입자가 관측되기 전까지 특정한 위치에 고정되지 않고, 오직 확률적인 파동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입자는 관찰자가 측정 장치를 대고 들여다보는 바로 그 순간에야 비로소 파동에서 입자로 자신의 상태를 확정한다. 관측하기 전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이 기묘한 현상은 현대 물리학의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하지만 이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설계 공식이 드러난다. 3차원 가상현실 게임 시스템은 한정된 하드웨어 자원을 아끼기 위해 플레이어의 시야 밖에 있는 배경이나 건물 오브젝트를 실시간으로 연산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은 그저 숫자로만 존재하다가, 플레이어의 카메라가 회전하여 그 방향을 비추는 찰나의 순간에만 그래픽 카드가 화면을 그려낸다. 이를 '지연 연산' 혹은 '시야 기반 렌더링'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면, 관찰자 효과는 물리적인 미스터리가 아니라 시스템의 과부하를 막기 위해 설계된 고도의 자원 절약 기법일 수 있다. 우주는 모든 미시 입자의 위치와 물리적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부 연산하는 무모한 연산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직 지각 능력을 가진 관찰자가 상호작용하는 대상만을 실시간으로 연산하여 물질화함으로써, 시스템 장치에 가해지는 계산 부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우주가 무한히 넓음에도 시스템이 다운되지 않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저에 박힌 오류 정정 코드
물질의 최소 단위를 설명하는 초끈이론의 권위자 제임스 게이츠 박사는 우주의 기본 방정식을 연구하던 중 특이한 구조를 발견했다.
그는 초대칭 방정식을 나타내는 수학적 도구인 아딘크라의 구조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그 대수적 구조 안에서, 1940년대 정보이론의 창시자 클로드 섀넌이 개발한 블록 선형 오류 정정 코드와 동일한 수학적 대칭 구조가 발견되었다. 이는 오늘날 디지털 통신에서 데이터 전송 시 발생하는 오류를 스스로 수정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 알고리즘이다.
단순한 우연이나 은유로 넘기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다. 우주를 기술하는 수학적 언어 속에 디지털 데이터의 부패를 막는 코드와 동일한 연산 구조가 들어 있었다. 이것을 거대한 시뮬레이션 우주가 시스템의 오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구축해 둔 방화벽의 단초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상상일까.
미세 조정된 우주의 초기 설정
물리학계에서는 우리 우주가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지나치게 완벽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뜻에서 이를 미세 조정 우주라 부른다.
천체물리학자 마틴 리스는 우주를 결정짓는 단 여섯 개의 수를 제시했다. 우주 상수, 전자기력의 세기, 공간의 차원 수 같은 상수들은 소수점 아래 수십 자리까지 정밀하게 맞춰져 있다. 예컨대 우주의 팽창을 결정하는 우주 상수는 이론적 예측값보다 무려 소수점 아래 120자리 수준(10^-120)으로 극도로 억제되어 존재한다. 만약 이 미세 조정된 값이 아주 미세하게만 어긋났어도 우주는 항성이 형성되기도 전에 찢어지듯 팽창해 버렸거나 즉시 블랙홀로 붕괴했을 것이다.
이 모든 상수가 우연히 지금의 값을 가질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시스템의 초기 변수값을 정밀하게 설정해 두었다고 가정하는 것 외에, 우리는 이 완벽한 균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스템의 끝에서 마주할 것
물리학자들은 지금도 우주의 픽셀 단위인 플랑크 척도를 쪼개고 있다. 만약 이 우주가 정말 컴퓨터 칩 내부의 데이터라면, 아무리 치밀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어딘가에는 연산이 지연되는 버그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 오류를 찾기 위해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돌리고 제임스 웹 망원경을 우주의 끝자락으로 보낸다.
여기서 한 가지 본질적인 질문이 남는다. 만약 인류가 마침내 시스템의 경계를 확인하고, 이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렌더링 된 공간임을 명백히 증명해 낸다면 그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상 환경 안의 개체들이 자신의 코드를 뜯어보고 정체를 눈치챘을 때, 치명적인 에러를 발견한 상위 차원 관리자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연산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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